주말로드스꼴라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박경리편) 리뷰, 나무

 

 

나라면 글 쓰는 도중에 분명 뛰쳐나왔을 거다. 나 아닌 누구라도 스스로 26년을 외부와 단절된 채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대하소설 작가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토지> 작가는 아무나 못한다. 박경리니까 했지.

고립과 고독 속에서 완성한 작품의 무게를 나는 가늠할 수 없다. 애초에 시리즈 소설은 초중학교 때 이후로 다음 편을 기다리는 설렘을 느껴본지 오래다. 그래서 나는 대하소설의, 토지의 무게가 부담스럽다. 시작하기 어렵다. 예전에 만화책으로 보는 토지가 있어서 만화니까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에 집어 들었다가 토속적인 분위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도로 돌려놓은 기억이 난다. 좀 더 끈기 있게 시도해볼 걸 그랬다. 토지를 읽어보지 못했으니, 책을 읽을 때 토지에 대한 궁금증만 커져갔다. 평사리가 어떻게 나오길래?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에 뭐가 있을까?

봉순과 이상현 사이에서 난 딸 양현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서희에게 이상현이 묻는다. “그건 나에 대한 복수인가?” 서희가 대답한다. “아니오, 그건 사랑이오. 봉순이와 나 사이의 사랑.”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대화인지 궁금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에 대한 이토록 멋있는 대답이라니. 토지의 시간을 사는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박경리가 원주에 오기까지 지나온 고달픈 시간이 있었다. 그의 사위인 김지하가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 되었고 그와 대비되게 지켜보는 가족들의 근심도 커졌다. 때문에 박경리는 딸과 손주를 위해 울타리라고 되어주고자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해서 허허벌판의 원주에서 처음산 것은 원고지 이만 장. 이것으로 토지를 이어 집필한다. 원고지를 수북이 쌓아두고 작업하셨을까? 상상해보았다. 글을 쓰다 집중이 흐트러졌을 때는 바느질을 하고 풀을 뽑았다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 다 관두고 싶으셨을 때도 있으셨겠지. 오롯이 내게 달린 이 마라톤을 어떻게 계속 할 수 있었을까? 시간이 많이 쌓이면 관성으로, 습관으로 할 수 있다던데 선생님도 그러셨을까. 왠지 잘은 모르지만 아니었을 거 같다. 계속 깨어있으면서 글을 썼을 거 같다.

소수자의 글쓰기는 더 어렵다고 들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질 만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업하다가도 분노하고 울분이 터진다. 누군가를 돌보고 생계와 가사를 병행하기도 한다감성의 젖어 있기엔 지치고 바쁠 때가 많다. 여성 작가로서 박경리 선생님에게도 그러한 어려움이 분명 있었으리라.오히려 원주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의 생활은 단조롭지만 참 풍요로워 보인다. 농사짓고 들고양이를 돌보고 옷을 짓고 글을 쓰는 생활. 포기한 것이 꽤 있었겠지만, 이미 그에게는 소설을 완성하겠다는 장인의 정신이 있었다.

원주에 가서 박경리 선생님의 흔적을 찾아보고 알아봐야지. 그리고 토지 읽기를 시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