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로드스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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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땡
2019.06.01
농땡 2019.06.01

 

- 걷는사람, 하정우를 읽고

농땡

 

  인생은 종종 길로 비유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걸어온 길이라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다.  이번 주에 읽은 <걷는 사람, 하정우>에는 걷기, 그러니까 하정우를 하정우 라는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과 그의 인생,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람 하정우가 힘들 때, 즐거울 때마다 걸었던 이야기와 배우 하정우, 그리고 감독 하정우, 요리하는 하정우 등 다양한 하정우의 삶의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정우가 걸으며 느꼈던 감정을 진솔히 풀어낸 덕분에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뜨끔하기도 하며 내가 걸어가는 길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특히 더 와닿았던 부분을 되새겨보자. 걷기와 독서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고 핑계대기 좋다는 것이다. 하정우는 자신의 경험을 곁들이며 걷기와 독서를 통해 누리는 행복을 말한다. 근데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인 걷기와 늘 새로운 다짐의 첫 순위로 오르는 독서가 하면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참 좋다는 걸 아는데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정우가 책에서도 말했듯이, 길 위에서 도전의 의미가 아니라 포기할 이유를 찾아 정당화하듯, 나 또한 걷기와 독서를 미루기 위한 핑계를 참 많이도 나열했었다. 그랬던 내가 말 그대로, 길 위의 학교 로드스꼴라에서 매달 책을 읽고 방방곡곡을 걷게 되었다. 덕분에 잡다한 핑계보다, 한 걸음을 내딛고 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의지와 습관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막상 책을 읽고 또 걷다보니, 왜 그렇게 미뤄왔나 싶을 만큼 하루하루가 풍성해졌다. 참 감사한 일이다. 

  하정우는 감독으로서 고전하면서, 배운 것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깨달음이 나에게도 진득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슬럼프란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 다른 측면일 뿐이다." 하정우가 노력해서 나에게 필요한 휴식을 누리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피로를 누적시키는 방기의 차이를 구분하듯이, 하정우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통과 노력을, 슬럼프와 포기가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적절한 방법으로 노력하고, 나에게 필요한 휴식을 취하면서 파도 타듯 슬럼프를 흘려보내는 것은 그러니까 나의 의지, 내가 내딛는 한 걸음에 달린 것이다. 

  기독교인인 하정우가 자신은 그저 겸허히, 그리고 감사히 자신의 두 다리로 주어진 길을 걸어나갈 수 있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걷는 사람 하정우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엄마아빠가 다시 보였다. 우리 엄마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여름방학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셨다. 그 당시는 엄마아빠의 여행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었다. 그리고 우리집 식탁 맞은 편 유리창에 붙어있는 전국지도에는, 엄마아빠가 걸었던 둘레길이 표시되어있다. 방방곡곡 많이도 다녀오셨더라. 성당을 다니시는 두 분도 아마 비슷한 기도를 하시지 않을까. 로드스꼴라를 다니면서인지, 아니면 내가 철이 조금 든건지, 아니면 둘 다인건지 엄마아빠가 살아가는 방식과 두 분이 걸어온 길이 보이기 시작했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몰랐었는데, 내 인생의 거의 모든 부분이 엄마아빠가 걸어간 길이었다. 내가 걷기 좋으라고 닦아놓은 길이기도 하고, 엄마아빠가 즐겁게 걸어간 길이 나에게도 즐거운 길이 되었다. 엄마아빠가 걸어간 길뿐만 아니라, 내가 앞으로 걸어갈 무수히 많은 길도 모두 누군가 조금씩이라도 걸었던 길일 것이다. 그 모든 길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 두 다리로 뚜벅 뚜벅 걸어갈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  

  이상이 내가 하정우에게 걷기를 영업당하여, 요 며칠 늘 타던 버스가 아니라, 걸어서 출근하며 느낀 것이다. 평소보다 부지런히 나가서, 일하러 가는 길을 걸어갔다. 버스를 타면 약간 돌아가서 환승도 해야하는 길인데, 내가 다니던 중학교 언덕길로 걸어가니 더 가까웠다. 대략 십년전에 내가 매일 헐레벌떡 뛰어다녔던 길을 덕분에 오랜만에 걸어보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온 몸으로 햇살과 바람을 느꼈다. 블루라이트 차단 렌즈로 된 안경을 끼고 다녀서 몰랐는데, 어느 날은 안경을 벗어보니 연보라빛을 띠면서 발광하는 느낌일정도로 파아랗던 하늘을 보면서 걸었다. 혼자 걸으면 내 선곡에 따라 달라지는 분위기도 좋고, 알아서 걸어지는 다리에 몸을 맡기면서 생각에 골몰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예쁜 자연이 비집고 들어오는 틈도 좋다. 같이 걸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가다 숨소리와 발소리에 다시 잠겼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말들도 좋다. 하정우처럼 하와이에서 십만보를 걷고, 돋궈진 입맛에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저절로 숙면에 취하게 되는 것도 좋다. 떠별들과 걸을 한양 도성과 지리산 둘레길이 기대된다. 앞으로 엄마아빠와 걸을 길도 기대 된다. 나 혼자 걸어갈 길도 기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