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기 떠별

페트라 켈리-나는 평화를 희망한다

유럽으로의 귀환

 

가톨릭교회와의 결별

페트라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의지 했어요. 그런 교회에게 처음으로 실망을 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첫 영성체를 준비하던 때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이 예식에서 페트라를 제외 당합니다. 아빠가 엄마와 자신을 떠난 것이지만 엄마와 자신이 불이익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요. 교회에서 항상 사랑과 용서를 배웠는데, 이런 식으로 배제되니 아이러니 했어요. 하지만 그 후로 쭉 교회의 가르침을 받고 자랍니다. 그녀가 처음 성서를 접하며 자신의 신앙을 분석하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곳은 미국이었습니다. 가톨릭 계열 학교를 다니지 않다 보니 가톨릭의 모순과 갈등을 더 냉철히 보게 되었지요. 여기서 멈추지 않은 그녀는 교황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등 자신만의 활동을 했습니다. 동생 그레이스의 죽음 후 매일매일을 신앙에 의지하며 견뎌내던 그녀는 좌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생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드리게 된 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오직 남성 뿐인 유럽

1971101일 페트라는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의 총무부에 취직하여 수습 업무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때로는 겁이 날 만큼 큰 사건들이 벌어지는 세계였죠. 하지만 페트라의 마음에 걸렸던 가장 큰 부분은 이 곳 분위기였습니다. 완전히 남성 중심 그 자체였어요. 오죽하면 이 거대한 베를레몽 건물 위에 얌전하게 휘날리는 유럽공동체의 깃발에 나는 종종오직 남성 뿐인 유럽이라는 글귀를 새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1972년 수습사원 과정을 끝 낸 후 경제 및 사회 복지 위원회의 행정 사무관으로 발령 받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녀는 유럽연합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분명한 페미니스트의 입장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운동권 단체들도 남성 우위의 분위기가 너무 강했어요. 정신 없이 흘러가는 사회운동 속에서 그녀는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입장을 확고하게 취하고 연설을 하고 다닙니다. 요점을 딱 집어내는 그녀 특유의 적절한 비유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페트라의 반핵운동

이 즈음 페트라는 많은 남성들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가장 강렬했던 사랑이면서 첫 사랑인 만스홀트와의 관계는 특별했어요. 1972년 봄 두 사람은 처음 만나게 됩니다.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있다는 걸 발견한 페트라는 놀라웠던 동시에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숨기지 않고 연인 사이가 되죠.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은퇴를 앞 둔 66살의 만스홀트는 이미 오래 전 결혼을 했고 현재 손자까지 있었던 것이죠. 페트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페트라와 함께 살려고 합니다. 페트라는 그저 낭만적인 사랑만 그렸을 뿐, 새 살림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고민을 하던 찰나 만스홀트는 고혈압이 심각해져 생사의 고비를 넘나듭니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의 사랑은 끝납니다. 만스홀트 통해 페트라는 국경을 초월한 정당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되요. 그러면서 시간은 점점 빠듯해져 가고요. 특히 페트라는 반핵운동에 힘을 쏟고 있었어요. 1970년 동생 그레이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1973년 방사선과 암의 관계를 규명하고 암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좀 더 편안하게 돌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그레이스의 이름으로 재단을 하나 세웁니다. 또 페트라가 반핵운동에 힘을 쓰게 되는데는 계기가 있습니다.

캐롤과의 사랑을 통해 페트라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싶었으나 오랜 고민 끝에 그러지 못할 것 같자 병원에 갑니다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데 의사가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어려서부터 엑스레이 사진을 너무 많이 찍었기 때문에 뱃속의 아기한테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얘기했어요. 낙태의 경험과 그녀가 느꼈던 불안, 이 두 0가지를 핵의 공포라는 맥락으로 연결시켜 운동을 이어나갑니다.

시민단체와 녹색당

1970년대 말 페트라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집니다. 페트라가 가장 설레며 지켜보았던 현상은 전국적으로 번져 가는 다양한 시민운동단체의 결성이었어요. 별 볼 일 없는단체의 수는 1000여개에 달했고 이들이 모여 만든 것이 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 연합’ BBU입니다. 자기 동네 뒷마당의 핵발전소 건설이나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전국적으로 국가 차원의 정책에 주민들의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고 합칠 수 있게 되었어요. 페트라는 BBU의 상임 위원이 돼요. 평화로웠던 시위들이 점점 과격해지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운동의 주류 정치 개입을 희망하기도 해요.1979 318, 지방선거에 진출하려다 실패한 정치연맹의 대표들, 그리고 보이스의 자유대학에서 모인 무리들이 대안정치 연대인 나머지 정치연합-녹색당을 창설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모입니다. 페트라는 비폭력과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그리고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정당 반대당, 즉 녹색당 운동을 통해 생명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페트라는 녹색정치연합의 대표로 유럽의회에 출마하기 위해 어렵게 사민당을 탈당했습니다. 국가를 초월하는 새로운 녹색가족이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