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버에서
한국에서 떠나 영국에 도착한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고 내일이면 벌써 20일 여행이 끝나. 아직 돌아가려면 한참이 남았는데 그리운 것들이 참 많네. 요즘 나는 여행을 하면서 나를 자주 돌아보게 돼.
조금 전에 밤바다를 산책했어. 저 멀리서 등대 불빛이 돌아가고 있었고 파도 부서지는 소리, 걸을 때 마다 발밑에서 부딪히는 자갈 소리가 좋았지. 가만히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다냄새는 또 어떻고. 조용한 도버의 밤바다에서 복잡했던 생각을 많이 정리했던 것 같아. 그 순간에 머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숙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네. 도버의 밤바다는 내게 좋은 추억이 될 거야.
2011. 5. 31. 프노이마가.
Chatsworth House
영화 ‘오만과 편견(2005)’의 촬영지로 유명한 체스워스 저택(Chatsworth House)은 실제로 데번(Devon)이라는 공작가문의 집이었다. 왕을 초대하기 위해 만든 방이 있을 정도로 화려한 저택도 저택이지만 걷다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갈 것 같은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더욱 끌었다. 잔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중정모를 쓴 백발의 할아버지가 박자를 맞추며 뮤직박스를 돌리고 있었다. 나무와 종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낡은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어린 아이들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점심을 먹은 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는 뮤직박스 앞으로 갔다.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는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끝나고 박수를 치자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윙크를 날리곤 다음 곡을 시작했다. 영국에서 만난 가장 멋있는 젠틀맨이었다.
사진만 봐도 가고 싶지? 세븐 시스터즈
라파엘
우리는 20일 여행의 마지막을 영국 남쪽에 있는 Eastbourne에서 마무리 했다. 아침 일찍 2층 투어 버스를 타고, 푸른 들판에 내렸을 때는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었다. 스마트폰의 나침반을 켜고 남쪽을 찾아 가던 중 많이 맡아 본 익숙한 바다 냄새가 밀려왔다. 안개가 자욱이 낀 바다에 작은 빨간 등대가 있었고, 그 등대는 나에게 묘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안개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며 궁시렁 거리고 있을 때 쯤 신기하게도 안개가 걷히고,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햇빛이 비추며 내 앞에는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던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끝이 안 보이는 하얀 절벽,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들판, 에메랄드 빛깔의 투명한 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장면 속에 들어와 있었다. 영국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말하라면 세븐 시스터즈를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