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꼴요즘


안녕하세요. 문집팀 - 문집걸스의 르네 별찌 쏠 유랑 찌루 입니다. 

지금쯤 한국은 쌀쌀한 가을이 지나고 있겠지만 베트남은 아직도 반팔의 계절이에요.


로드스꼴라는 10월 8일부터 10월 17일까지 베트남의 중부를 여행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분들을 만나 얘기도 듣고,

위령비와 증오비 앞에 서서 참배를 하며 기억에 대한 고민도 했습니다.

또, 베트남의 DMZ에 가서 분단선을 넘으며 이젠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 나라와 통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꽝아이성


선미 증적 박물관 Sơn Mỹ


1968년 3월 16일 미군은 선미마을에 들어가 민간인 504명을 죽였다. 

모두 여성과 노인 그리고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고 강간 당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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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바깥으로 나오면 커다란 동상이 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온 몸으로 감싸고 있는 동상이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심지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 형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목숨을 잃었다고.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꿈을 찾아서 열심히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만한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한순간에 그저 죽어버렸다. 

전쟁은 도대체 뭘까.

명확히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정말 무섭고 끔찍한 것은 분명하다.



팜탄콩 박물관장님  Phạm Thành Cô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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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중, 멍한 표정의 아이가 하나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들 그리고 어린 여동생이 온 몸으로 둘러싸 살려낸 남자 아이의 사진이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만난 팜탄콩 관장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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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오기 전,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과 

피해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와 고통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피해자들은 그 날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 기억이 계속 떠올라서 매우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그 분들에게 전쟁의 이야기를 묻고 기록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인지 헷갈렸다.

팜탄콩 관장님께선 그 날의 기억을 끄집어 내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이

생존자로서 자신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말씀하셨다.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탄타오시인  Thanh Thả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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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탄타오 시인은 정말 평화를 사랑하고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여행을 오기 전까지 평화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평화는 뭘까. 조용하고 고요하면 그것이 평화일까. 전쟁이 없으면 그건 평화일까.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다. 전쟁이 없어도 평화가 없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 자신의 모든 인권을 누리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평화로운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을 하고 얼마나 자주 고민을 하면 하나의 개념에 대해 자신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여행의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 나에게 평화란 너무나 이상적이고 환상 속의 것처럼 보인다.

단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것처럼.



<제주 벚꽃>


소녀의 뺨처럼 보드라운

갑자기 홍조를 띠는 꽃잎들

 

일본의 사쿠라가 아닌

But이라는 이름의 제주 벚꽃


버스도 아니고

미국 대통령 이름도 아닌

아마도 Bụt (베트남어로 부처라는 뜻)에 가까운, 그러나 분명치는 않은

아름다움은 저마다 제 길을 갖는 법이니

 

황홀하게

아찔하게

산 채로 지는 꽃잎들

땅 위에 쌓이고

 

그대는 광주에서 죽어간 

젊은 학생들이라 했다

벚꽃처럼 젊은 죽음

 

그대는 제주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영혼이라 했다

 

벚꽃 공간에 매달린

 

처럼

가볍게

떨어지는

꽃잎들


<HOA ANH ĐÀO JEJU>

 

mịn như da mặt con gái


những cánh hoa chợt ửng hồng

 

không phải sakura Nhật Bản
a

nh đào JeJu tên but

 

không phải xe bus


không phải tên Tổng thống Mỹ

có lẽ gần với Bụt, nhưng chưa hẳn


vì cái Đẹp vẫn có đường đi riêng của nó

 

ngất ngây


choáng

những cánh hoa rụng tươi nguyên


xếp lớp trên mặt đất

 

em nói: đó là những sinh viên chết cho nền dân chủ


ở đại học QuanZhu

chết trẻ như hoa anh đào

 

em nói: đó là linh hồn những người bị thảm sát
ở JeJu

 

lơ lửng một không gian anh đào

 

những cánh hoa


nhẹ


rơi


như


đá


trắng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 _르네


도안응이아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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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봄은 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네"


꽝남성 빈호아 마을을 방문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12월, 

빈호아 지역 다섯 개 마을 민간인 430명이 희생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마을 입구엔 그 날을 기억하는 증오비와 위령비가 서있었다.

증오비에는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는지 쓰여있었고

위령비에는 그 날 희생된 마을 주민들의 이름과 나이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대부분이 아이, 여성, 노인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고 그 날 학살의 생존자인 도안응이아 아저씨를 만났다.


도안응이아 아저씨는 생후 9개월 때 전쟁을 겪었던 분이다.

그 날 온 가족을 잃고 눈에 화약 가루가 들어가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수류탄 파편에 큰 부상을 당한 채 고아가 된 도안응이아를 마을사람들은 마치 제 자식처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항상 누워 지내던 도안응이아가 5살 때 처음 앉고, 10살 때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땐 온 마을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장애인 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두 아이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계신다.

우리를 맞이했던 도안응이아 아저씨의 조그만 흙집은 마을사람들이 아저씨가 15살이 되던 해 지어줬다고 한다.

자신에게 마을은 달콤한 사탕 같은 것이라며 해맑게 웃으시던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서

  '공동체란 뭘까? 무엇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견고히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도안응이아 아저씨의 밝은 웃음이 바라보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따뜻했다.

학살이라는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평화로운 삶을 사신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평화 속에 살아갈 수 있을까? 평화로운 삶이란 뭘까?'

지금껏 별 생각없이 쉽게 내뱉던 '평화'라는 말이 얼마나 무게감 있는 단어인지 다시금 느꼈다.

 마지막으로 '도안응이아의 봄'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함께 나누고 싶다 :)



<도안응이아의 봄>_문진오


평화의 봄은 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네

우리 엄마도 돌아오지 않았네 

그날 우리 엄마가 나를 구했다고 

그걸 잊지 말라고 음 

동네 사람들이 내게 말 해주네 

그래서 나는 엄마 더욱 보고 싶네

평화의 봄은 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네 

평화의 봄은 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네 


한번 잡은 사람의 손 그 촉감과 

온기 목소리 나는 잊지 않네 

그러나 나는 엄마 얼굴 감촉이 어떤지 

미루어 하나도 알 수 없네 음 

언젠가 만날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해 내 운명을 살아야 하네

평화의 봄은 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네 

평화의 봄은 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네




꽝남성 하미마을 _쏠


하미마을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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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정월,

밝은 달을 보며 조상에게 제를 올리고 축복을 기원하는 날.


조상에게 복을 기원하기도 전에

사탕도 주고, 쌀도 주고, 집도 지어주던 사람들이

달의 힘을 받아 무자비한 늑대괴물로 변해버렸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를,

쭈글쭈글 노인을,

사탕을 빨던 아이를,

논 일 하던 여인을 사지로 내몰았겠는가.


135. 

이 일백삼십오라는 숫자로는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미래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 사라져 버린,

헤아릴 수 없는

여전히 위로받지 못 한,

우주들의 이름이 한 자 한 자 적혀있는 위령비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져 버렸다.



팜티호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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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앞에서 터진 수류탄에 자식을 잃고 발목을 잃었다.


당신의 발목을, 자식을 잃었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을 적은 없다.


매일매일 구걸해 번 그 꾸깃꾸깃한 돈을 두 아들 앞에서 

인두로 주름 한 점 없이 펴내며

"이것은 네 동생의 목숨값, 이것은 네 이모의 몫숨값."

"이것이 삶이다."하였다.


그 때의 어머니를 기억하는 첫 째 아들 록아저씨는 

그리도 비장한 어머니의 표정을 본 적이 없다한다.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팜티호아 할머니를 회상하며

롭아저씨가 "어머니 올 봄(설)에 나는 못가요~" 노래 할 때,


아저씨도 울고,

나도 울고,

팜티호아 할머니도 울었다.


비가 펑펑 내렸다.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 _유랑


탄 아주머니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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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우옌 티 못, 응우옌 티 템, 짠 로...

  위령비에 써진 이름을 하나 하나 천천히 읽어내렸다.

  믿을 수 없는 죽음들은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이어져 내려갔다.

  비문 밑에 놓여진 노랗고 하얀 꽃들은 향냄새에 가득 휘감겼다.


 *1968년 2월 12일 퐁니•퐁넛 마을, 74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 중 34명은 13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었다.


 응우옌티탄이라는 19살의 소녀는 퐁니퐁넛마을에 살았다. 

그녀는 아오자이 입는 걸 좋아했다.

매일 매일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다녔고 농사일을 할 때마저 

아오자이를 입어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해 무용수가 되고 싶었던 8살의 응우옌티탄도 퐁니퐁넛마을에 살았다.

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 어머니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난한 집이었지만 

어린 탄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5살의 남동생과 11살의 언니, 14살의 오빠,

그리고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탄 남매를 돌봐주는 이모와 열 달 난 이모의 아들까지.

1968년 2월 12일, 그 날도 그저 그런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범한 날.

마을 어귀의 1번 국도에서 느닷없이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지나가던 군부대의 탱크가 뒤집어졌다.

정월에 드릴 제사를 위해 마을의 여자들과 함께 아들 찐쩌를 데리고 장을 보러나가던 득 할머니는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쏘며 달려오는 군인들을 보고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려 다급히 달아났다.

퐁니퐁넛 학살은 득 할머니의 두려움 가득한 뜀박질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길바닥은 군인들의 군화 발자국으로 뒤덮였고 수류탄은 

어린 아이들의 머리에 맞아 터졌으며, 마을 들판엔 총에 맞아 널부러진 사람들이 쌓여갔다.

  "내가 그 때 우리 엄마를 얼마나 찾았는데... 우리 엄마를 얼마나 불렀는데..."


내 앞엔 50년의 세월을 견딘 나이 든 아주머니가 아니라, 

엄마를 그리워하는 8살의 소녀가 앉아있었다.

우리를 만난 아주머니는 학살의 시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을 지 몰라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탄 아주머니는 그 날을 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돌려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천천히 감아볼 수도, 빨리 감아볼 수도, 또 잠시 멈춰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배에 입은 상처의 고통을 느끼고 전쟁의 시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이면

며칠을 아픔의 밤 속에 뒤척이는 아주머니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태풍을 예고하는 강한 바람이 온 얼굴과 온 몸에 부딪혀왔다.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그 고된 인생을 설명해주듯,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이 내 손바닥과 맞닿았다.

그 손이 내 어깨를 감싸안고 내 팔을 어루만졌다.




꽝찌성 _찌루


DMZ 탐방


 남부에서는 베트남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법을,

 중부에서는 도대체 전쟁이 무엇이길래 한 개인의 삶을 저토록 무참히 파괴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북부로 넘어 가기 직전에는 결국 우리는 어떻게 통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오늘 이 시간까지 통일에 대해 그닥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통일을 했을 때의 좋은 점이 별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소중한 가족과 만나는 것과 고향을 되찾는 기쁨도 있지만

무엇보다 통일이 되면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념의 갈등으로 서로를 질책하는 불필요한 논쟁도 멈출 것이며

이러한 질책과 의심 등으로 인해 쌓여 가는 피로감도 사라질 것 같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이어 주던 히엔르엉 다리를 건널 때 내딛는 걸음의 방향이

통일을 위한 걸음이라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떨렸다.

이제는 비무장 지대(DMZ)가 '과거'가 된 베트남이 정말 정말 부러웠다. 


 베트남은 전쟁으로 통일을 이뤄냈다.

북베트남이 승리했기 때문에 남베트남의 병사들에게는 '전사'라는 호칭도 쓸 수 없다.

국기 게양대에는 북베트남 국기가 올려졌고 남베트남의 국기는 낡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다.

전쟁을 통해 승전국과 패전국이 나뉘고 결국엔 온 국토가 승전국의 나라가 되는 것이

현재 통일 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래도 한 때 국가였던 곳의 흔적을 지우는 것. 이것이 과연 '좋은' 통일의 방법일까?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 국가인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는 날,

그곳에는 대한민국의 국기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도 아닌 새로운 국기가 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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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과거 베트남의 분단선을 넘는 우리


-히엔르엉 다리.

 과거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이어주던 다리였다. 이 다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는 관광객을 위해 분단선을 기준으로 절반은 노란색, 다른 절반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과거에는 베트남이 무엇으로든 나누어지는 것이 싫었던 베트남인들이 있었기에 다리에 칠을 할 때,

남베트남 쪽에서 파란색으로 하면 다음날 북베트남 쪽도 같은 파란색으로 다리를 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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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목땅굴


 빈목땅굴은 항미전쟁(베트남 전쟁) 당시, 꽝찌성 빈목마을의 사람들이 폭격을 피해

 '도저히 지상에선 못 살겠다' 하는 마음으로 땅 속에 생활 공간을 만든 곳이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꽝찌성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피해의

7배에 다다를 만큼 폭격이 어마어마 했던 곳이다.

 오죽했으면 한 사람당 7톤의 폭격을 견뎌야 했을까.

 그때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 갈 수 밖에 없던 그들에게 하늘은 없었다.

하늘을 뒤 덮는 융단 폭격이 그들의 하늘을 빼앗았다.

땅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현장 학습 하듯 땅굴 밖으로 나와

잠깐의 햇빛과 지상의 공기를 들이 마시고 들어 가는 모습이 짠했다.

그러나 그들의 땅굴의 삶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손으로 또 다른 세상을 개척해낸 그들이 위대해 보였다.

베트남의 정신력이 미국의 물리력을 이겼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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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빈목땅굴은 구찌땅굴에 비해 공간이 넓어 걸어 가기 훨씬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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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열심히 걸어 나가는 야니의 뒷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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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빈목땅굴을 나온 7기 떠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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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빈목땅굴 전시관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사진이다.

   베트남의 박물관과 전시관에 가면 여성들에 관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위에 사진 제목은 '빈린 여전사의 미소' 이다



베트남 중부 - 호이안과 다낭과 후에의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